2009년 8월 14일 금요일

뇌사와 식물인간은 다르다?

뇌사와 식물인간은 다르다?
뇌사와 식물인간은 다르다? [제 710 호/2008-01-23]

지난 1월 2일 고(故) 최요삼 선수가 뇌사판정을 받았다. 최 선수는 12월 25일 인터콘티넨탈 플라이급(50.8kg) 타이틀 1차 방어전에서 상대 선수를 압도하며 심판 전원일치로 3-0 판정승을 거뒀다. 하지만 경기 직후 의식을 잃고 순천향병원으로 이송됐다. 경기 도중 받은 충격으로 뇌출혈이 일어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최 선수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뇌사 판정을 받은 날 자정에 장기적출을 해 공식적으로는 1월 3일 생을 마감했다. 최 선수와 가족의 동의로 6명이 새 생명을 얻었다. 최 선수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뇌사와 장기이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1968년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은 특별보고서를 통해 뇌사를 ‘Irreversible Coma’(비가역적 혼수상태)라고 정의했다. 즉 뇌가 영원히 기능을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특히 심장 박동이나 호흡처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뇌간이 죽었다. 따라서 뇌사가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심장이 멎어 죽음에 이른다. 인공호흡기에 의해 얼마동안 호흡과 심장박동을 연장할 수 있지만 회복할 가능성은 없다.

이점에서 뇌사는 식물인간과 다르다. 식물인간은 뇌의 일부가 손상을 입어 의식이 없지만 뇌간은 생생히 살아있다. 인공호흡기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호흡할 수 있고, 가끔 눈을 깜박이거나 신음소리를 내기도 한다. 수개월이나 수년 뒤에 기적적으로 깨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식물인간은 장기기증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뇌사는 장기이식을 전제로 할 때만 인정된다. 장기이식을 하려면 가능한 ‘건강한’ 상태의 장기를 얻는 것이 필수다. 그만큼 뇌사판정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뤄져야 한다. 2002년 개정된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의해 뇌사판정에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우선 체온이 32℃ 이하로 떨어진 저체온상태나 저혈압 등으로 인한 쇼크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 마취제 같은 약물중독이나 저혈당 같은 내분비 장애가 있어도 안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뇌사가 아님에도 뇌사로 오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원인이 확실한 뇌의 손상이 있고 인공호흡기로만 호흡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전제 조건이다.

이 조건 아래 외부자극에 반응이 전혀 없는지, 스스로 호흡하는 기능이 완전히 없어졌는지, 동공이 열려있는지, 뇌간반사가 완전히 소실됐는지 등을 검사한다. 뇌간반사란 대뇌를 거치지 않고 일어나는 반사다. 의식이 없어도 뇌간이 살아있으면 빛을 비추면 눈동자의 크기가 작아지고, 눈의 각막을 건드리면 눈을 감는 반사가 일어난다. 뇌사한 사람은 이 같은 뇌간반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 항목을 검사한 지 6시간이 지나면 앞의 검사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의사가 다시 검사한다. 그때도 똑같은 결과를 얻으면 뇌파를 검사해 30분 이상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지 확인한다. 뇌사판정검사에 참여하지 않은 전문의 3명 이상을 포함한 6~10명의 뇌사판정위원회가 구성되고 여기서 전원이 찬성하면 최종적으로 뇌사판정이 내려진다. 이때 전문의 중에는 신경과 전문의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뇌사판정이 내려지면 가능한 신속하게 장기적출을 한다. 이때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장기를 척출하면 냉동상태로 보관해 신속히 병원으로 이송한다. 이때 장기를 제공받을 수여자는 이미 수술 준비를 마치고 수술대에 누워있는 상태다. 장기척출과 이식 수술이 순차적으로 맞물려 진행되기 때문에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장기이식에서 가장 큰 문제는 면역거부반응이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자신이 아닌 것을 죽이도록 프로그램 돼 있다. 기껏 넣어준 장기가 면역체계에 의해 파괴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기이식을 할 때는 수여자에게 면역억제제를 다량 투여한다. 이때 수여자가 세균의 공격을 받으면 방어할 수단이 없으므로 무균실로 옮겨 철저하게 관리한다.

일단 몸이 이식한 장기를 받아들이면 면역억제제의 양을 줄여도 괜찮지만 평생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 있다가 소생한 사람에게 이 정도 부담이 무슨 대수겠는가. 회복이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을 때 장기이식은 최후의, 그리고 최선의 치료법이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따르면 2007년 장기를 기증한 뇌사자는 모두 148명이다. 매년 조금씩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는 이보다 훨씬 빠르게 늘고 있다. 매년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100명 중에 불과 1명만 혜택을 받는다. 기다리다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내 장기이식 뇌사자의 수는 100만명에 3.1명으로 스페인의 30명, 미국의 25명에 비하면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또 우리나라는
본인이 장기이식을 신청했어도 가족이 반대하면 성사되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최 선수의 아름다운 기증 소식으로 장기기증 신청자가 평소의 3배나 늘었다고 한다. 최 선수가 일으킨 작은 변화가 계속 이어지려면 장기기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할 수 있다.
 (글 : 김정훈 과학칼럼니스트

숨겨진 북한의 최고 과학자, 리 승기 ( 과학의 향기)

숨겨진 북한의 최고 과학자, 리 승기 ( 과학의 향기)
숨겨진 북한의 최고 과학자, 리승기 [제 665 호/2007-10-10]

우리나라에서 과학자를 모델로 우표를 발행한 적은 없다. 그러나 북한은 두 차례나 한 명의 과학자를 기념한 우표를 발행했다. 바로 합성섬유인 ‘비날론’의 발명자 고 리승기 박사(1905~1996)가 주인공이다. 리 박사는 1960년대 초반까지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친 과학자로, 북한에서는 이례적으로 그에 관한 대중용 전기가 출판될 정도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리 박사는 1905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마츠야마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뒤 1931년 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과를 졸업했다. 훗날 그가 쓴 자서전에 따르면 가난한 형편 탓에 대학 시절 결핵을 앓기도 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

원래 리 박사가 연구하기 원했던 분야는 합성섬유였지만 조선인 출신이 일본에서 직장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도 교수였던 기타(喜田)의 추천으로 처음에는 아스팔트를 연구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아스팔트와 관련한 다수의 특허를 취득하는 성과를 올린 리 박사는 곧이어 자신이 원하던 합성섬유를 연구할 기회를 잡는다. 바로 교토제국대 부설 일본화학섬유연구소에 연구강사로 임용된 것이다.

1938년 미국 듀퐁사가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을 개발하면서 세계 각국에 합성섬유 연구 열풍이 불었다. 원래 세계적인 비단, 면직물 수출국이었던 일본도 합성섬유 연구에 뛰어들었다. 미국과 달리 일본은 폴리비닐알콜(polyvinylalcohol, PVA) 계열의 고분자 화합물을 원료로 쓸 수 있는지 연구했다. 나일론은 석유를 원료로 필요했지만 폴리비닐알콜은 석회석을 원료로 했기 때문에 석유가 나지 않는 일본에 적합했다. 또 PVC로 만든 합성섬유는 나일론이나 아크릴 섬유에 비해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이 뛰어나 면직물을 대용하는데 유리했다.

마침내 1939년 리 박사는 PVC로 ‘합성섬유 1호’를 개발했다. 합성섬유 1호는 단순한 개인적인 영광 그 이상의 것이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리 박사가 거둔 성공은 조선인의 자랑이 되기에 충분했다. 과학잡지 ‘과학조선’은 조선인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리승기를 지목했고, 종합잡지 ‘조광’(朝光)도 ‘세계의 학계에 파문을 던진 합성1호의 기염-리승기 박사의 고심 연구달성’(1939년 12월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이를 두고 리 박사는 자서전에서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를 거론하며 자신의 연구 성과가 일본 과학의 성과로 귀속된다는 사실에 무척 안타까워했다. 게다가 리 박사의 연구가 공업화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완전한 실용화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우선 합성섬유 1호는 뜨거운 물에 닿으면 쉽게 수축됐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열처리를 하는 경우 착색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리 박사는 제조 공정 중에 포르말린 대신 아세트알데히드를 넣는 방법을 고안해 1942년 무렵까지 합성섬유 1호의 대부분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연구가 서둘러 상업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당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어서 자신의 연구가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품 생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리 박사의 의도대로 합성섬유 1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상업화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편 리 박사는 헌병에게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빌미로 일본 오사카 감옥에 갔다가 거기서 광복을 맞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리 박사는 서울대 공대학장, 대한화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지만 얼마 뒤인 1950년 7월 31일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평양에 간다. 리 박사의 월북 배경을 둘러싸고 어떤 이들은 그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기울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네다섯 차례에 걸친 끈질긴 월북 권유를 물리쳤고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하지 않은 사람이다.

다만 당시 남한은 과학자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반면 북한은 해외에 거주한 조선 과학자까지 초빙해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적극 지원했다. 아마 리 박사에게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에서의 근무와 비날론연구소 설립을 제안한 것이 그가 월북한 가장 큰 요인으로 추측된다.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은 당시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대공장으로, 카바이드와 아세틸렌, 아세트산, 아세트알데히드 등을 생산했다. 이들은 모두 합성섬유를 만드는 원료였다.

김일성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1961년 연간 2만톤의 비날론을 생산하는 공장이 완공됐다. 석회석과 무연탄, 전기를 이용해 만든 카바이드를 기본 원료로 삼아 만드는 비날론(Vinalon)은 비닐알코올을 축약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비닐론(Vinylon)이라 불린다. 그 뒤 ‘주체사상’이 담론으로 등장하면서 비날론은 ‘주체섬유’로 불릴 만큼 획기적인 성과였다.

무엇보다 비날론은 조선인인 리 박사가 개발했고, 질감이 조선의 전통 옷인 면과 비슷하며, 북한에 풍부하게 매장된 석회석을 원료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북한의 공업화와 체제 건설의 역사와 나란히 서술되고 있다. 북한 정권은 리 박사에게 노력영웅 칭호와 제1회 과학부문 인민상을 수여했다. 병으로 드러누웠을 때 김일성이 그에게 100년 된 산삼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광복 이후 남한에서 과학자를 우대했다면 리 박사가 서울대 응용화학과에서 길러낸 제자들과 함께 집단으로 월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미군정이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간주해 서울대의 학제개편을 미국식으로 강요한 탓에 담양으로 낙향했을 때도 “아편쟁이가 아편을 잊지 못하듯 비날론을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한국인 과학자의 해외 두뇌유출을 걱정하는 것처럼 과학자에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생수병에 콜라 담으면 안되는 이유?( 과학의 향기)

생수병에 콜라 담으면 안되는 이유?( 과학의 향기)
생수병에 콜라 담으면 안되는 이유는? [제 695 호/2007-12-19]

건강과 미용에 좋다는 ‘웰빙’ 혼합차가 한창 인기다. 길을 가는 여성들의 손은 테이크아웃 커피 대신 혼합차병을 들고 있다. 이런 유행이 가능한 데에는 갖고 다니기 쉬운 용기, 즉 페트병이 한 몫을 하고 있다. 만일 유리병이나 캔에 담겼다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혼합차 페트병은 생수병과 좀 다르다. 훨씬 단단하고, 뚜껑이 있는 주둥이 부분이 투명하지 않고 하얀 색이다. 혼합차 성분을 오랫동안 변함없이 유지하기 위해서다. 생수를 시작으로 탄산음료, 과즙음료, 맥주, 혼합차까지 페트병이 담을 수 있는 음료의 스펙트럼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새로운 기능성을 갖는 페트병이 속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변신을 거듭하는 페트병에 대해 알아보자.

페트(PET)는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olyEthylene Terephtalate)의 약자로 플라스틱의 한 종류다. 플라스틱은 그 구성성분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예를 들어 칫솔, 볼펜 같은 플라스틱제 생활용품은 주로 폴리에틸렌(PE)이나 폴리프로필렌(PP)으로 만든다. 가볍고 싸고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스틱병은 거의 100% 페트재질이다. 다른 재질에 비해 페트가 병으로 많이 쓰이는 이유는 뭘까?

우선 페트는 투명도가 유리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나다. PE나 PP가 따라갈 수 없다. 기체 투과도도 중요한 요소다. 내용물이 물이라면 별 문제가 아니지만 탄산음료나 주스가 되면 병의 자격조건이 까다로워진다. 병속의 이산화탄소가 빠져 나가도 안 되고 바깥의 공기 중 산소가 안으로 들어와도 문제가 생긴다. 페트는 PE나 PP에 비해 기체 차단성이 50배나 더 높다.

페트의 높은 강도도 장점이다. 같은 두께일 경우 PE나 PP에 비해 페트가 더 단단하다. 비슷한 강도를 지닌 병을 만들 경우 그만큼 재료를 아낄 수 있다. 단열성도 뛰어나서 영하 160℃까지 내려가는 국제우주정거장 표면에 페트재질의 단열층이 붙어있을 정도다. 이런 여러 장점 덕분에 음료를 담을 용기로 페트가 선택됐다.

같은 재질로 돼 있지만 페트병은 내용물에 따라 모양새가 제각각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페트재질 자체도 조금씩 다르다. 경제성과 기능성을 고려해 목적에 맞는 최적의 조건을 찾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수병과 콜라병을 놓고 보면 같은 용량일 경우 생수병이 더 두께가 더 얇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밑 부분이다. 생수병은 편평한데 비해 콜라병은 굴곡이 있다. 자세히 보면 밑이 반구처럼 볼록한 병을 세우기 위해 둘레로 대여섯 개의 지지대, 즉 발이 있는 형태다. 톡 쏘는 탄산음료를 담고 있으니까 병모양도 튀게 만든 것일까?

콜라와 같은 탄산음료 페트병이 이렇게 독특한 모양을 한 이유는 내부의 압력 때문이다. 이산화탄소를 주입하면 병 내부의 압력이 2.5~3.5기압이나 된다. 생수병 모양이라면 아래 부분이 압력을 이기기 못해 불룩 튀어나오게 된다.

따라서 제조된 날부터 소비자가 마실 때까지 고압의 내용물을 담고 있으려면 내부 힘을 분산시킬 수 있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페트병이 담고 있는 내용물의 성질, 보관조건에 따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한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적의 모양을 찾는 것이다. 실제로 생수병에 탄산음료를 넣고 시뮬레이션해보면 힘을 많이 받는 병 밑 가운데 부분이 불룩 튀어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페트병이 담는 음료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웰빙 음료, 맥주 등을 담을 기능성 페트병도 개발되고 있다. 웰빙 음료는 대체로 미생물에 취약하다. 생수는 영양분이 없고 탄산음료는 산성이라 미생물이 자라기 어렵다. 그런데 웰빙 음료는 보통 중성이고 영양분이 있어 미생물이 자라는데도 ‘웰빙’이다.

균을 확실히 죽이기 위해 90℃ 정도의 고온에서 병에 내용물을 넣는다. 그런데 일반 페트병이 물렁물렁해지기 시작하는 온도는 75℃로 90℃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따라서 물렁물렁해지는 온도를 90℃ 이상 끌어올리는 공정이 필요하다. 특히 주입하는 액체가 처음 닿는 병목 부분은 조금만 변형이 생겨도 뚜껑이 꼭 닫히지 않으므로 더 확실해야 한다. 병목 부분은 따로 적외선을 쬐여 온도를 높여준 뒤 서서히 식혀주는 결정화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분자들이 더욱 촘촘하게 배열된 고분자가 얻어지고 겉모습은 불투명한 흰색이 된다.

기체가 드나드는 것을 좀 더 확실하게 차단하는 페트병도 나왔다. 맥주는 이산화탄소가 톡 쏘는 게 제 맛이다. 사람들이 가장 쾌감을 느끼는 병속 압력은 2.5기압. 탄산음료의 경우 미리 3.5기압의 이산화탄소를 넣어 유통과정에서 조금 빠져 나가도 탄산의 느낌을 주도록 한다. 그러나 맥주는 자연발효 과정에서 탄산이 생성되는데 2.5기압 정도밖에 안 된다. 따라서 공기 유입이 완전히 차단되는 페트병이 필요하다. 맥주 패트병은 안팎의 페트재질 층 사이에 기체 차단성이 높은 특수 합성수지 필름이 놓여있다.

세계적으로 페트병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일년에 나오는 페트병은 150만t에 이른다. 무겁고 깨지는 유리, 속이 안 보이고 한 번 따면 다 먹어야 하는 알루미늄 캔. 페트병에 익숙해질수록 이런 불편함이 더 거슬린다. 게다가 이제는 담지 못하는 내용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기능성 페트병이 나오고 있다. 이제 모든 병은 페트로 통하는 게 아닐까. (글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과학의 향기 ..과속 단속카메라 어디 어디 숨었나?

과학의 향기 ..과속 단속카메라 어디 어디 숨었나?
과속 단속카메라 어디어디 숨었나? [제 705 호/2008-01-11]

오늘은 오나전 씨가 오랜만에 데이트 약속을 잡은 날이다. 나소중 씨와 시외로 나가 드라이브도 하고, 근사한 저녁도 먹을 생각이다. 소중 씨가 운전대를 잡았다. 소중 씨는 ‘장롱 면허’ 신세에서 벗어난 지 막 한 달 째. 오늘 처음으로 고속도로에 도전한다. ‘내가 꼭 운전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맡기긴 했지만 나전 씨는 좀 불안하다.

“소중 씨, 괜찮아요?”
“그럼요. 저 이래 봬도 한 달 동안 시내 주행을 통해 갈고 닦았는 걸요. 믿고 맡겨 보세요.”
“좋습니다. 그럼 덕분에 오늘은 편하게 데이트해 볼까요.”
옆자리에서 보니 소중 씨 운전할 때 의외로 터프한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 ‘속도광’이라고 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때 ‘붕~’하고 앞으로 나가는 느낌이 짜릿하다고 했던가. 그래봐야 시속 100km 내본 것이 최고라고 하지만.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곳곳에 과속 단속카메라가 눈에 띈다.

“소중 씨, 저 앞에 과속 단속카메라 보이죠?”
“네.” (엄청 긴장하고 있다.)
“혹시 단속카메라가 어떻게 자동차 속도를 측정하는지 알아요?”
“그럼요. 야구경기에서 투수들이 공 던질 때도 속력이 나오잖아요. 그거랑 똑같은 원리로 하는 거 아니에요?”
“역시. 모르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이건 좀 달라요.”
말하는 순간 과속 단속카메라가 있는 지점을 통과했다. 물론 소중 씨는 시속 100km 이하로 ‘안전 운행’ 중이라 과속 단속카메라에 걸릴 염려는 없다.

“정말요? 전 같은 건 줄 알았는데.”
과속 단속카메라에서 센서는 공중에 달려있는 카메라가 아니라 바닥에 있어요.
“바닥이요? 바닥에 무슨 센서가 있어요?”
“그럼 다음 과속 단속카메라가 있는 지점에서 한번 도로를 잘 봐요. 바닥에 네모 모양으로 그어진 금이 10~20m 간격으로 연속으로 두 개 있을 거에요. 아, 저기 앞에 있다. 잘 봐요.”
“어, 정말이네. 모든 차선에 네모 금이 두 개씩 있네요.”
“그렇죠? 네모 금 아래쪽에는 전선이 깔려있어요. 차가 지날 때 전선에 흐르는 자기장이 변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감지하는 거죠. 첫 번째 금을 밟고 난 뒤 두 번째 금을 밟을 때까지 시간을 측정하는 거예요. 두 금 사이의 간격이 10m일 때 시속 100km로 달리면 0.36초가 걸리죠. 만약 그보다 시간이 적다는 뜻은…”
“시속 100km보다 빨리 달렸다는 뜻이네요.”
“그래요. 시속 100km가 넘으면 전방의 카메라가 사진을 찍죠. 하지만 기기의 오차를 고려해서 최대시속 100km 구간이라면 110km까지는 단속하지 않는다고 해요.”

“오호라. 그럼 앞으로 저 두 개의 금 사이를 지날 때만 속도를 살짝 줄이면~”
“시속 100km가 소중 씨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이면서 욕심 부리시긴. 제한속도를 지키며 가도 시간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아요. 게다가 작년 말에 새로운 방식의 과속 단속카메라가 등장했다구요.”
“새로운 방식이요?”
‘레이더 방식 차량검지장치’라고 하는 건데요. 60GHz의 레이더를 사용해서 차량에서 반사되는 신호를 수신하죠. 차량의 속도, 차의 종류, 교통량 등을 한꺼번에 측정한다고 해요. 게다가 바닥에 센서를 넣는 방식이 90~95%의 정확도인데 반해 이 방식은 98%의 정확도를 자랑한다고 하네요.”
“와, 대단하네요. 그래도 카메라를 보고 피하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도로 한쪽에 달려있으면 최대 8차선까지 한 대의 기기로 감시하는 것이 가능하데요. 사실 운전하면서 도로 한쪽 귀퉁이에 높이 달려 있는 카메라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죠. 올해부터 경찰청과 지방자치단체의 의무 구매 대상으로 지정돼 있다고 하니, 곧 여러 곳에서 볼 수 있겠죠.”

“정말, 고속도로에는 카메라가 엄청 많아요. 이게 다 과속 단속카메라는 아니죠?”
“그럼요. 교통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카메라, 버스전용 차선제를 위반하는 차를 단속하는 카메라, 과적차량을 단속하는 카메라가 있죠. 게다가 운전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달려있는 카메라도 있어요.”
“이렇게 많으니 카메라만 보고서는 피할 수 없겠네요.”

“이뿐만이 아니에요. 구간단속이라고 들어봤어요?”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고….”
구간단속은 그 지점의 순간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구간의 평균 속도를 측정해서 제한속도보다 빠르게 달린 자동차를 찾아내는 거예요. 단속카메라 바로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 속도를 올리는 이른바 ‘캥거루식 과속’을 막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거예요.”
“어떻게 평균 속도를 알아요? 구간이 길면 통과하는 차의 수가 엄청 많을 텐데.”
“바닥에 센서를 넣는 방식과 원리는 같아요. 구간의 시작 지점과 끝 지점을 지나는 시간이 제한속도로 달렸을 때보다 빠르면 과속한 거죠. 이때 차량을 파악하는 기술이 중요한데 구간의 시작 지점과 끝 지점에 카메라를 달아서 번호판 등을 찍어서 파악해요. 인식 기술이 필수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에서 4개 나라에서만 쓰고 있어요.”
“헤헤…. 그거 어디서 볼 수 있어요?”
“작년 12월부터 영동고속도로 서울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에 둔내터널 부근 7.4km 구간에 처음으로 시행되고 있어요. 올해 1월 중에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와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에도 설치될 예정이에요.”

“이거 과속운전하기 점점 더 힘들어지네요. 좀 아쉬워지는데요?”
“그럼요. GPS수신장치가 달린 차량항법장치에 의지해 과속 단속 구간만 피하는 사람이 있는데 차량항법장치를 100% 신뢰하는 건 금물이에요. 차량항법장치는 과속 단속카메라가 있는 지점을 미리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해 뒀다가 운전자에게 알려주는 건데, 단속 지점이 옮겨지면 차량항법장치는 잘못된 정보를 주게 되죠. 처음 운전할 때부터 교통법규 잘 지키는 운전습관을 들이세요.”
“나전 씨가 보기에 제가 운전하는 건 어때 보여요?”
“아주~ 좋아요. 사실 처음엔 좀 긴장했지만 이제 등을 의자에 기대도 되겠는데요. 앞으로 데이트할 때 운전은 소중 씨가 하는 걸로 할까요?”
“에헴, 좋죠. 맡겨 두시라!” (글 : 김정훈

KISTI 의 과학의 향기

KISTI 의 과학의 향기
자판기가 미성년자를 구별한다구!? [제 706 호/2008-01-14]

최근 일본에서 스스로 미성년자를 구별해내는 자판기가 등장해 화제다. 개발사에 따르면 10~60대까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약 90% 정확도를 보였다고 한다. 고객들이 ‘성인 인증’ 버튼을 누르면 내장된 카메라가 얼굴을 찍고, 컴퓨터가 주름, 눈, 입 등 신체 특정 부분을 분석한 다음 성인인지 여부를 판별한다. 판별에 걸리는 시간은 3초 정도. 미성년자들에게 유해한 담배 같은 물건을 파는 자판기에 우선 도입될 예정이다.

이 자판기는 미성년자를 구별하기 위해 얼굴인식기술을 사용한다. 얼굴인식이란 한 마디로 카메라가 얼굴의 이미지를 잡으면 소프트웨어가 이를 저장된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해 개인의 얼굴을 인식하는 기술이다. 홍채, 지문, 정맥 인식 같은 다른 생체인식기술에 비해 얼굴인식기술은 먼 거리에서 인식이 가능하고 비접촉식이라는 장점이 있다. 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사람들의 거부감이 덜해 쉽게 대중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최근 각광받는 얼굴인식기술에 대해 알아보자.

얼굴인식기술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가장 먼저 개발된 것은 2D 얼굴인식기술이다. 쉽게 말해 사진을 찍어 분석하는 것이다. 미성년자를 구별하는 자판기도 2D 얼굴인식기술이 적용됐다.

개인의 특성을 분석하기 위해 사람마다 눈, 코, 입과 같은 얼굴의 특징 점들의 위치나 크기 또는 이들 간의 거리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Geometrical feature analysis)이 많이 쓰인다. 또 얼굴 이미지의 기본요소를 분석하거나(Eigenface approach), 얼굴 이미지를 얼굴 전체를 나타내는 하나의 템플릿 화상과 비교해 이에 따른 상관도를 분석(Template matching approach)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통계적 분석을 기반으로 신경망의 학습 및 인식기능을 이용하는 방식(Neural network mapping approach)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런 2D 얼굴인식 방식은 빠르지만, 환경에 따라서 인식의 정확도가 크게 차이가 난다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즉 조명의 밝기에 따라 얼굴영상 정보가 손실 또는 왜곡되기 쉽다. 또 얼굴이 촬영되는 각도, 표정, 헤어스타일, 안경의 착용여부에 따라 제대로 인지를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예를 들어 집의 현관에 2D 얼굴인식기술로 작동하는 잠금장치가 돼 있다면 미용실에 다녀온 뒤 집에 못 들어가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열적외선을 투사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이는 가시광선을 이용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적외선을 이용한다. 얼굴 혈관에서 발생하는 열을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해 그 패턴을 분석해 개인의 고유특성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열적외선 방식은 조명의 양이 다르거나 얼굴에 상처가 생기거나, 수염이 나는 등의 변화가 있어도 얼굴을 인식할 수 있다.

최근에는 얼굴인식에 3D 영상을 이용하는 기술이 나왔다. 이 방식은 눈두덩이, 코, 턱 주위 등 얼굴의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곳에 점을 찍어 각 점들 사이의 관계를 기록한다. 수평적인 관계뿐 아니라, 깊이를 나타내는 제3의 축을 도입하기 때문에 더 많은 얼굴 데이터를 만들게 된다. 3D 얼굴인식기술을 이용하면 정면 사진과 다른 각도에서 찍은 얼굴도 알아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성형 수술을 해 얼굴이 통째로 바뀌지 않는 한, 조명이 변하고 감정에 따라 표정이 바뀌어도 얼굴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3D 얼굴인식을 쓰면 일란성 쌍둥이까지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피부의 미세한 주름 등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3D 얼굴인식은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판별해야 하기 때문에 계산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실제 현장에서는 2D, 3D, 열적외선의 장점을 취합한 방식이 유력하다. 3D 데이터를 이용해 얼굴 포즈를 교정한 뒤, 이를 2D로 변환해 2D 얼굴 인식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다양한 각도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2D의 단점과 처리시간이 긴 3D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또 열적외선 영상과 가시광선 영상을 조합하면 조명에 취약한 기존 2D 영상의 문제점을 열적외선 영상으로 보완할 수 있다.

9.11테러 이후 미국, 호주, 영국 정부기관은 외국인의 신원확인과 보안용도로 얼굴인식기술 도입을 확대하고 있다. 또 금융권에서는 훔친 카드로 ATM에서 출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얼굴인식 ATM기기를 곧 내놓을 전망이다. 그리고 가격이 낮아진다면 PC 같은 개인용 보안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사실 기술의 성패는 사소해 보이는 곳에서 결정되기도 하는 법이다. 대부분의 첨단기술이 그렇듯 소비자의 거부감을 얼마나 줄이냐에 따라 얼굴인식기술의 성패도 결정될 것이다. (글 : 유상연 과학칼럼니스트)

‘우산도’는 역시 독도였다

‘우산도’는 역시 독도였다
독도 영유권에서 커다란 쟁점이었던 ‘우산도(于山島)가 독도’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발굴됐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독도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인 유미림(柳美林) 박사는 최근 이 개발원이 발간하는 ‘해양수산동향’ 1250호에서 “조선 후기 박세당(朴世堂·1629~1703)이 쓴 ‘울릉도’를 분석한 결과, 우산도는 울릉도가 아닌 독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독도가 원래 우리 땅’이었다고 할 때 그 중요한 근거는 우산도(于山島)의 존재였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울진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무릉’이 울릉도, ‘우산’은 독도라는 것이 한국 학자들의 해석이었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주석에 “우산도와 울릉도가 본래 한 섬이었다는 설도 있다”는 내용을 근거로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①울릉도이거나 ②울릉도에서 동쪽으로 2㎞ 남짓 떨어진 죽도(竹島)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 독도 배경의 일출. /동해해경 제공

하지만 유 박사 등이 조선 후기 주요 학자 중의 한 사람인 서계(西溪) 박세당의 기록 ‘울릉도’를 분석한 결과는 달랐다. 이 글은 박세당의 11대 후손이 2001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한 ‘서계 종택 고문서’ 중 ‘서계잡록’에 실려 있는 필사본으로, 지금까지 사료의 존재가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세당은 이 글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갔다가 돌아온 승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대개 두 섬(울릉도와 우산도)이 그다지 멀지 않아 한번 큰 바람이 불면 닿을 수 있는 정도다.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날씨가 매우 맑지 않거나 최고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울릉도에서) 보이지 않는다(不因海氣極淸朗, 不登最高頂, 則不可見).”

▲ 서계 박세당의‘울릉도’원본.

이 기록은 ①‘우산도’는 분명 울릉도와 같은 섬이 아니라는 사실과, ②죽도나 관음도처럼 울릉도와 인접한 섬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죽도·관음도는 울릉도에서 높이 올라가지 않거나 날씨가 흐려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산도’가 될 수 있는 섬은 독도밖에는 없다.

이는 박세당과 동시대 인물인 삼척영장 장한상(張漢相·1656~1724)이 쓴 ‘울릉도 사적’에서 “(성인봉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록과도 통하는 것이라고 유 박사는 설명했다. 박세당과 장한상은 모두 일본측으로부터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확인을 받은 숙종 때의 어부 안용복(安龍福)과 동시대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인식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처음 발굴된 것으로, 독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밝히는 매우 훌륭한 자료”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우리 역사

 

재미있는 우리 역사
- 신라에는 황금으로 만든 집이 있었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를 보면 '금입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금'이 쇠인지, 황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금입택이 신라 후기 헌강왕 때 경주에서 가장 잘 사는 집임을 뜻하는 것임에는 틀림없고, 따라서 황금으로 해석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금입택에 사는 사람의 재산은 거의 재벌 수준이어서 웬만한 절 하나는 한 집안에서 너끈히 세울 수 있었습니다. 경주에는 이런 금입택이 경치 좋은 곳에 35채 있었다고 하네요. 그 중에는 김유신의 집(재매정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경주는 그야말로 부유한 대도시였습니다. 헌강왕 때는 '초가집이 하나도 없고, 노랫소리와 피리소리가 하루종일 이어졌다'고 삼국유사에 나와있죠. 834년 귀족들에게 사치생활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 수레나 말 장신구, 집에 금을 못 쓰도록 한 거죠. 이것이 금입택이 황금으로 만든 집이었을거라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금입택에 사는 진골귀족들은 신라 초기에는 왕위를 독점하는 성골귀족들에 비해 한 단계 낮았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사촌여동생 진덕여왕이 혼인을 하지 않아 사실상 성골의 대가 끊기자 김춘추 장군이 진골 출신 최초로 왕에 오르면서 진골들의 시대가 열립니다. 진골들은 성골들보다는 단계가 낮았지만 장관, 장군을 독점했고 나라로부터 막대한 땅을 하사받았습니다. 삼국통일 후에는 전공에 따라 막대한 보상, 전리품을 받았고 개인 병사를 키우기도 했죠. 신라 말기, 왕권 다툼이 심해지면서 왕권이 약해져 개인 병사가 있었던 진골 귀족들은 왕권으로도 통제하기 어려워질 지경에 이릅니다. 금입택의 진골 귀족들이 절을 만든 것도 자신들의 엄청난 재산을 합리적으로 빼돌리기 위해서였죠.
-조선시대에도 그린벨트가 있었다?
맞습니다. 한양성 4대문을 기점으로 약 10리까지의 외곽지역(성저십리:성 밑 10리)이 그것인데, 성 안은 한양성이라고 했지만 그 외곽까지는 한성부라고 했습니다. 성저십리는 동쪽으로 흥인지문(동대문)-마장동 바깥 중랑천 부근, 서쪽으로 돈의문(서대문)-마포 망원정 근처, 남쪽으로 숭례문(남대문)-용산 등 한강변, 북쪽으로 숙정문(북대문)-북한산 인수봉까지였습니다. 이 성저십리에서는 소나무 베기를 금지했고, 산을 깎아 묘로 쓰는 것, 나무나 풀을 베고 태우는 것, 백성들이 나무뿌리를 캐 먹는 것, 돌을 채굴하는 것, 주택 건축 역시 모두 금지했습니다.
성저십리를 둔 이유는 첫째, 성 안 사람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즘보다 앞서가는 센스가 보이네요. 하지만, 성 안 사람들은 왕과 왕족, 높은 사람들과 양반들, 그 식솔들이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의 서울은 완전 소비도시였죠.
둘째, 성저십리는 왕실과 높은 사람들의 사냥과 놀이를 위한 곳이자, 일반 백성들의 접근을 막는 울타리였습니다. 사냥감을 보호하고, 놀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종 규제조치를 내렸던 거죠.
성저십리 안에도 사람들이 살았는데, 대부분 사대문 안에 농산물 공급하는 걸 일로 삼고 살았습니다. 아현동에선 미나리, 용산-이태원에서는 호박과 수박, 왕십리-뚝섬에서는 배추와 무를 생산했습니다. 오늘날, 그린벨트 안 사람들이 오랫동안 경제적 손실과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것처럼, 성저십리 사람들도 각종 규제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농업으로 생계를 꾸렸던 것입니다.
-가발은 조선시대, 부(富)를 누리는 여인들의 센스
가발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했는데, 당시 국제적 호평을 받아 중국에 수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려 때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더 유행했죠. 조선시대에 들어와 가체(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덧넣는 머리)는 부(富)의 상징이 되었고, 너도나도 이 멋진 가체를 쓰려고 기를 쓰기에 이릅니다.
머리 사치 때문에 집안 재산을 탕진하기도 하고 가체를 마련 못하면 시부모에게 예를 드리지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1756년 영조는 양반집 여성들에게 가체 대신 족두리를 쓰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족두리가 훨씬 사치스러워졌고, 1763년 영조는 다시 가체를 쓰라고 했습니다. 영조의 실패에 손자 정조가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를 쓰되 금, 은, 진주같은 걸로 장식하지 못하도록 하고, 머리를 땋아 쪽머리를 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가체 금지령은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쪽머리는 정조의 아들 순조 때 정착했죠.
-조선시대, 노비들의 값은 말보다도 못했다?
1398년 태조에게 올린 보고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노비의 값은 비싸봐야 오승포 1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값은 4,5백필에 이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무릇 노비 값은 남녀 가리지 않고 15~40세까지는 400필, 14살 이하나 41세 이상인 자는 3백필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 목숨 파리 목숨만도 못한 전쟁 때는 노비 값도 더 떨어졌습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는 말 1마리, 노비 10명을 바꿨다고 하네요. 임진왜란 때 말1마리가 은돈 10냥(전투용 큰 말은 더 비쌈.)이었다니 노비 1명이 은돈 1냥에 불과했던 겁니다. 노비는 주인이 맘대로 사고팔 수 있었고, 재산상속 때는 노비 수를 세서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줬습니다. 그래서 부모자식간에 생이별을 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죠. 이후 19세기 동학농민운동 때도 소 1마리와 노비 5명(예쁜 계집종 1명 포함)을 바꿨다고 합니다.
-18세기 인삼수출의 최대경쟁국은 미국이었다?
인삼은 우리나라에서 2천년 전부터 재배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의 무역에서 인삼은 우리나라 최대의 수출품이었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인삼이 재배된 건 17~18세기 중국과 밀무역을 하던 개성 상인들에 의해서입니다.
미국은 캐나다 몬트리올을 중심으로 한 동북부의 야생 인삼을 가지고 베이징이나 광동에서 우리나라와 경쟁했습니다. 야생이라지만 그 거대한 땅에서 캐왔으니 양이 많았죠. 그러나 무분별한 채취로 미국의 자연산 인삼 양은 점점 줄어듭니다. 결국, 경쟁에서는 우리가 승리했죠. 인삼을 바칠 것에 대한 조정의 가혹한 요구, 개성상인들의 발빠른 대응이 오히려 인삼 재배를 시작하게 해 미국과의 무역 경쟁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월급
조선시대 관리들은 1년 월급을 2~4회에 걸쳐 곡식으로 받았습니다. 월급 받을 때가 되면 8도 관리들이 와우산 자락(지금의 서강대 근처)으로 몰려들죠. 그들은 이조(지금의 행정자치부)나 병조(지금의 국방부)에 가서 패를 지급받은 다음, 패를 가지고 관리들의 월급창고라 할 수 있는 광흥창(지하철역 지명에도 남아있죠)으로 가서 직접 월급을 받았습니다. 이 곳의 곡식은 전라도나 충청도산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경국대전>을 근거로 조선시대 관리들의 월급을 살펴봅시다. 정1품과 왕의 아들인 대군들: 쌀 100석, 옷감 32필(녹만 받아가지고는 부자가 될 수 없는 정도입니다. 깨끗한 관리로 이름난 청백리들이 낙향해서 살기 어려웠다는 부분이 이해가 되는군요.)을 받았습니다. 이러하니, 종9품 최하위 관리들이 받는 월급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쌀 14석, 옷감 4필이 전부입니다. 쌀 1석이래야 80kg 쌀 한 가마보다 적은 것이니 이것만으로는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액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적게 주는데도 녹봉이 국가 재정의 절반까지도 차지했다네요.
-우리의 오랜 상속전통은 장자상속이 아닌 균분상속
균분상속이란 똑같이 상속하는 것이죠. 조선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으며, 율곡 이이도 그에 따랐습니다. <경국대전>에 법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죠. 이러한 균분상속은 17세기 말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여자도 출가 여부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상속을 받았고, 그것은 신라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이었습니다. 신라에서는 왕위계승에도 아들과 사위, 친손자와 외손자 사이에 차별이 없었고 고려, 조선에서도 그러한 전통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전통이 조선 중기 이후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제사를 모시는 데 따른 부담이 큰 작용을 했습니다. 사실 명문가라도 대대손손 출세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자녀가 많으면 날이 갈수록 재산이 줄기 마련이죠. 그에 따른 대책이 제사를 모시는 큰아들에 대한 상속을 늘리고 딸에게는 상속을 하지 않는 장자상속이었던 것입니다. 남녀 균분상속의 전통은 이후 수백년이 지나 1991년에야 민법으로 되살아나게 되었죠.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기업들
박승직상점(지금의 두산): 19세기 말 유명한 거상 중 하나가 박승직입니다. 전국을 무대로 면직물 유통을 하던 그는 1896년 8월, 33세에 서울 배오개에 상점을 열었습니다. (박승직상점) 박승직은 두산그룹 창업주인 박두병의 아버지인데, 그가 연 상점은 한국 최초의 개인기업이었죠. 면직물을 팔았던 박승직상점은 사업이 날로 번창해 전국에 지점을 내게 되었고, 1925년 주식회사로 전환합니다. 박승직의 장남 박두병은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에 4년간 근무한 후 1937년부터 박승직상점 전무이사로 취임, 경영을 시작했고 1946년 두산상회로 상호를 바꿔 오늘날의 두산그룹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한성은행(지금의 조흥은행): 한성은행은 1897년 2월 지금의 안국병원 자리에서 문을 엽니다. 그 때 건물은 방 2개에 마룻방이 하나인 20평 초가집이었습니다. 방 하나는 은행장실이었고, 또 하나에는 은행원들이 업무를 봤습니다. 손님들은 마룻방에서 기다렸죠.
한성은행은 김종한의 한성전당포를 인수해서 시작했습니다. 은행장에는 고종 황제의 사촌 이재완, 부은행장에는 김종한이 있었습니다. 좌총무에 이보응, 우총무에 이완용의 조카 한상용을 두었죠. 주요 업무는 일본에서 돈을 빌려 그것을 다시 한국인들에게 대출하는 것으로 고수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휴업을 했다가 1903년 공립한성은행으로 다시 설립되어 황실과 정부 재산, 금융업무 등을 하다가 1928년 조선식산은행에 흡수되었고, 1943년 동일은행과 합병해 오늘날의 조흥은행이 되었습니다.
동화약품: 부채표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이 백년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시는 분 많지 않을 겁니다. 동화약품은 1897년 9월 서울 중구 순화동에 동화약방을 세우고 그 첫 작품으로 활명수를 내놓았던 것으로, 1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죠. 활명수 발명가는 궁중 선전관이었던 민병호로 궁중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시켜 만든 국내 첫 양약입니다. 그의 아들 민강이 아버지의 발명품을 만들고 팔기 위해 동화약방을 세웠죠.
동화약방은 그 후 1937년 윤창식이 인수했고, 그 후에도 제약업을 고집하여 오늘날의 동화약품에 이릅니다.
-돈 없어 결혼 못하면 국가가 보조금을 줬다?
조선의 독특한 제도 중 하나가 혼인보조금제도입니다. 혼인비용이 없어 30이 넘도록 혼인을 못하면 나라에서 비용을 주도록 한 법이죠. 그 비용은 호조(지금의 재정경제부)에서 댔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나서서 개인의 혼사까지 관여한 이유는 성종의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륜의 도리는 혼인보다 중한 것이 없고, 제왕의 정사는 원녀, 광부가 없게 하는 것이 긴요하다" 원녀는 혼인을 못해 원한을 갖게 된 여인, 광부는 장년의 독신 남자입니다. 즉, 백성들이 혼인을 하지 못함으로 원한을 갖거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왕의 중요한 정사의 하나라고 여겨졌던 것이죠. 또,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람도 적당한 때에 짝을 만나 음양의 화합을 해야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책임지는 왕이 가난한 백성의 혼인비용을 대주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대상이 양반집 자녀였다는 데서 조선이 철저한 양반 중심 사회였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