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100년 특별전 대표유물
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 공동기획
[출처] [한국문화, 그 찬란한 기억 ]
김홍도 시문(詩文) 모은 서첩…베일에 가린 '만능 예술가'를 엿보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만큼 오랜 세월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화가가 또 있을까. 풍속화가로 유명한 그는 또한 산수화,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을 비롯한 인물, 화조(花鳥), 사군자(四君子), 불화(佛畵) 등 다방면의 그림에 능했다. 뿐만 아니라 제시(題詩·그림에 쓴 시나 각종 글) 등을 통해 유려한 서체를 엿볼 수 있고, 시조 두 수가 전해지는 등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거문고와 피리 등 음악에까지 조예가 깊었기에 르네상스 시대의 만능 예술가에 비견된다.
[6] 베일에 가린 '만능 예술가'를 엿보다
하지만 김홍도는 여전히 베일에 가린 인물이다. 죽은 해는 1806년 이후로 추정되나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태어난 해가 1745년으로 확실해진 것도 반세기가 안 된다. 김홍도의 탄생 연도는 그의 늦둥이 외아들 김양기가 선친의 시문(詩文)을 모아 서첩으로 꾸민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을 통해 밝혀졌다. 이 서첩에서 김홍도는 명말청초 서예가인 왕탁(王鐸·1592~ 1652)의 편지를 6쪽에 걸쳐 옮겨 적은 후, "을축년(1805년) 회갑 되는 해 정월 22일 아침 우연히 써 연록(아들 김양기의 별칭)에게 준다"고 썼다.
하지만 김홍도는 여전히 베일에 가린 인물이다. 죽은 해는 1806년 이후로 추정되나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태어난 해가 1745년으로 확실해진 것도 반세기가 안 된다. 김홍도의 탄생 연도는 그의 늦둥이 외아들 김양기가 선친의 시문(詩文)을 모아 서첩으로 꾸민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을 통해 밝혀졌다. 이 서첩에서 김홍도는 명말청초 서예가인 왕탁(王鐸·1592~ 1652)의 편지를 6쪽에 걸쳐 옮겨 적은 후, "을축년(1805년) 회갑 되는 해 정월 22일 아침 우연히 써 연록(아들 김양기의 별칭)에게 준다"고 썼다.
〈단원유묵첩〉은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최순우 선생이 1966년 〈단원 김홍도의 재세연대고(在世年代考)〉라는 논문에서 처음 소개했다. 최 선생은 덕수궁미술관(구 이왕가미술관)이 국립박물관에 통합돼 이전하면서 창고에 있던 유물 가운데서 이 서첩을 발견했다. 이 서첩은 1914년 이왕가(李王家)박물관에서 당시 돈 15원을 주고 일본인에게 구입했다. 모두 40쪽으로 구성됐으며, 표지에 '못난 아들 양기가 삼가 꾸몄다[不肖男良驥謹裝]'는 내용이 적혀 있다. 홍석주·신위의 서문과 홍길우·홍건우의 발문이 각각 서첩의 앞뒤에 첨부돼 있는데, 내용은 단원의 그림과 글씨에 대한 상찬(賞讚), 선친의 서첩을 꾸민 아들에 대한 칭찬이다.
〈단원유묵첩〉은 단원의 당호로 추정되는 '오수당(午睡堂)'을 시작으로 행서와 해서로 쓴 크고 작은 글씨들로 채워져 있다. 최치원과 이유겸 그리고 중국 명사들의 명문을 옮긴 것, 아들과 지인에게 쓴 간찰(簡札)도 포함돼 있다.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집안 모두 편안하고 너의 공부는 한결같으냐?[日寒如此家中都得安過 而汝之課讀如一否] 나의 병 증세는 내간서(內間書)에 이미 다 말하였으므로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구나[吾之病狀內間書中已悉矣不須更言耳]. (중략) 너의 선생님 댁에 보내는 학비를 보낼 수 없어 한탄스럽다[汝之師丈宅朔錢未能覓送可歎歎].' 아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는 노년기 병중의 생활고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글씨는 그 사람'이라는 말처럼 세로획이 긴 단원의 글씨는 그의 인품과 삶의 자세를 대변하듯 유연하며 당당하다. 〈단원유묵첩〉은 단원의 개인사는 물론 그의 인간미와 생활상, 서예 기량 등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큰 작품이다.
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직업 : 공무원(행정공무원)
학력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실장
국립전주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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